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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듯 저물지 않는
저물 듯 저물지 않는
저자 : 에쿠니 가오리
출판사 : 소담출판사
출판년 : 2017
정가 : 13800, ISBN : 9791160270280

책소개


에쿠니 가오리 2018년 신간 장편소설 출간!
문학 독자를 설레게 하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새로운 매력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사랑받는 작가 에쿠니 가오리가 새로운 소설로 돌아왔다. 신간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은 ‘소설 속 소설’이라는, 지금까지 에쿠니 가오리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형식으로 쓰여 더욱 반갑다. 나이 쉰이 넘도록 부모가 남겨둔 유산으로 먹고살면서 유일하게 열을 올리는 행위는 ‘독서’뿐인, 현실과 동떨어져 사는 듯한 탐독가 미노루와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뚜렷한 기승전결 없이 그저 흘러간다. ‘현실’은 밋밋한 반면, 예기치 못한 사건이나 연인 사이의 어긋남 같은 드라마는 미노루가 읽고 있는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이 소설은 아주 모호한, 그러나 그렇기에 현실적인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에겐 시간이 가고 나이 먹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맞이해야 할 어떤 결정의 순간이 유예되어 있다. 나름의 설렘과 즐거움으로 유예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순간의 안정감에 기대기도 한다. 미성숙한 과거를 서둘러 떨쳐내고 미래로 향하고픈 때는 지나온 사람들, 그렇게 고대했던 미래가 마냥 장밋빛은 아니라는 걸 이미 아는 사람들. 서둘러 앞으로 가기보다 지금 이 저물 듯 저물지 않는 시간에 그냥 머물려는 사람들.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이 뚜렷하지 않은 이 이야기는 그렇기에 우리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지독히 현실적이다.

목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서 미노루는 책에서 얼굴을 든다. 무척이나 밝다. 마치 여름 같다. “없어?” 오타케 목소리였다. 동시에 지금 계절이 여름이라는 것도 생각난다. 자신이 눈 덮인 산길에 있지 않다는 것도. “뭐야, 있으면서.” “벨을 눌러야지.” 미노루는 그렇게 말하면서 침대의자에서 일어난다. 리조트 호텔의 풀 사이드에 있는 비치 체어처럼, 접이식 침대의자의 나무틀이 삐거덕거렸다. “눌렀어. 문도 두드렸고.” 그러고 보니, 의식 멀리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좀 춥지 않나. 몇 도로 해놓은 거야.” 묵직한 유리 재떨이 -부모님 집의 거실에 옛날부터 있던 것이다. 미노루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집을 처분할 때 왠지 버릴 수가 없어 들고 와 리모컨을 담아두고 있다 -로 손을 뻗은 오타케가 멋대로 온도를 몇 단계 올렸다. 삐, 삐, 전자음이 여러 번 울린다. “히가시데 씨에게서 또 클레임이 들어왔어. 3개월이라면서?” “3개월?”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전적인 업무 위탁인데, 그쪽도 난감하잖아. 다른 임차인들에게 모범이 될 수 없는 셈이니까.” 절반까지는 아니어도 5분의 1 정도는 아직 눈 덮인 산길에 의식이 남아 있었다. 쉰여덟 살 남자의 감정 속에. --- p.8~9

두 시간 정도 책을 읽은 후에 여름 문안 편지를 열한 통 썼다. 오타케는 언제나 미노루에게 “너는 존재하는 게 일이지” 하고 말하지만, 미노루 자신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사람, 사람, 사람. 관계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친척들, 재단 관계자들, 지역 지자체 사람들, 조부모님 인맥(정치가들, 미술품 수집가들, 화랑 경영자들, 단가 관련 사람들), 부모님 인맥(양쪽의 친구들. 직업도 다양한), 몇몇 자선 단체, 동산과 부동산 관리자들, 집안 대대로 신세 지고 있는 병원 관계자들, 거기에 미술관 관계자와 자원봉사자들까지. 돈에 관계된 일은 고문 세무사 오타케와 고문 변호사 다나베(아직 30대인 젊은이로,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는 말만 꺼냈는데도 친척들이 결사반대했다)가 거의 전적으로 도맡고 있지만, 그래도 미노루 주위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조부모님 집도 그렇거니와 부모님 집도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집이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을 맞아 별장에 가도 가족끼리 단출하게 지내는 일은 없었다. 늘 누군가 손님이 있었다. 하지만 미노루는 장차 그 모든 것을 자신이 떠맡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미노루도 어렸을 때부터 낯을 많이 가렸지만 그보다 한층 비사교적이었던 스즈메는 대학을 졸업하자 바로 외국으로 나가버렸다. 독일에서 사진 전문학교를 다녔고, 졸업하고도 귀국하지 않은 채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 생활하다 지금은 일본과 독일에서 반반씩 지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유산에 버금가는 대인 관계 일체를 미노루가 떠안는 꼴이 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노루는 조부모님을 좋아했다. 부모님도. 그리고 물론 스즈메도. 미노루는 아마 스즈메를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할 것이다. 문안 편지를 부치러 나가는 길에 어디서 늦은 점심(겸 이른 저녁)이나 먹자고 생각하지만, 창밖은 아직도 한참 더워 보이고, 나가면 땀을 흘릴 게 틀림없으니 미노루는 또 읽다 만 책에 손을 뻗고 만다. --- p.31~32

남자는 목이 좍 그여 있었다. 4인용 객실에 혼자 느긋하게 앉아 차창에 머리를 기댄 모습은 기차 여행을 하면서 노곤하게 잠든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남자가 입은 셔츠와 스웨터는 피를 먹어 검게 변색됐다. 공포에 질려 눈을 번쩍 뜬 라스는 온몸이 마비된 듯 우뚝 서 있었다. 열차는 눈보라 속을 소리 없이 질주하고 있다.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코트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운전면허증에 기재된 이름은 에릭 로베르트손이었다. 사진과 얼굴을 비교해 본인이란 것을 확인하고, 라스는 지갑을 시신의 안주머니에 다시 넣으려다 잠시 동작을 멈췄다. 지문이 남았을까. 당연히 남았을 것이다. 늘 끼는 가죽 장갑이 하필 지금은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다. 미안하군. 라스는 마음속으로 시신에게 사과하고, 지갑을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에릭은 돈도 신용카드도 사용할 수 없다. 조야를 찾아낼 수도, 피아노를 칠 수도, 가족을 만날 수도 없다. 객실 문을 조금 열고, 밖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후 통로로 나갔다. 식당차는 비어 있었다. 아직도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데, 웃는 얼굴을 하고 창가 자리로 안내해준 웨이트리스는 눈치를 못 챈 듯하다. 라스는 레드 와인을 주문했다. “달리 주문하실 것은?” 메뉴판을 내밀었지만, 고맙다고 하고는 거절했다. 자신이 지금 막 보고 온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목이 베인 시신. 그런 것이 같은 열차에 타고 있다는 것을 웨이트리스도 카운터 안에 있는 젊은 요리사도, 딱 두 그룹의 손님 -중년 커플과 구석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대머리 남자 -도 모른다. 나도 몰랐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창밖 경치나 바라볼 수 있다면. --- p.38~39

그럼 아카네는 아직 모르겠군, 하고 미노루는 생각한다. 그다음에 조야의 동생이 라스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그녀의 지시를 따라 열차에 오른 라스가 시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미노루는 문득 얘기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물론 얘기할 리 없고, 얘기할 이유도 없지만,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하고 입이 근질거린다. 그리고 자신도 빨리 그다음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장소에서도, 나기사의 ‘얘기’에서도 멀리 떨어진, 그 장소로 돌아가고 싶다고. “아, 흘렸다.” 하토가 말해서 보니, 우윳빛 액체가 콘에서 몇 줄기나 흐르고 있었다. 테이블 냅킨꽂이에 꽂혀 있는 냅킨을 꺼내서 내민다. 총총 뛰어 카운터로 돌아간 아카네가 젖은 수건을 가져왔다. 이렇게 손에 다 묻히지 않고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없던 시절이 자신에게도 있었다는 걸, 미노루는 기억한다. 그러나 언제부터 손과 얼굴과 옷을 더럽히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되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 p.62

사야카는 치카가 함께 사는 두 번째 상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혼자 살기 시작했는데, 20대의 한 시기에 다른 여자와 산 적이 있었다. 정말 미숙한 연애였다. 치카 자신도 지금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왜 그랬는지 늘 세상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상대와는 언제나 싸우기만 했다. 이쪽에서 울리기도 했고, 그쪽에서 울리기도 했다. 그렇게 심신이 다 지치는 관계를 어떻게 5년이나 지속할 수 있었는지, 지금은 오히려 감탄스럽다. 마지막에는 피차가 너덜너덜해졌다. 근친을 증오하는 심리에 가까운 감정을 품은 채 헤어졌다.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이 하는 조그만 음식점 일을 거들기로 결심했을 때, 치카 나이 서른이었다. 그리고 가게 단골이었던 사야카를 만났다. 발톱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부엌에 가니, 사야카는 테이블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채점이야?” 물었는데 대답은 없고, “완두콩, 끝났어?” 하고 또 어린애 같은 집념을 발휘해서 농담조로 묻는다. “끝났어.” 치카는 대답하고, 발톱을 내려다본다. 발가락 열 개 끝이 정말 완두콩 색이었다. --- p.77

기억을 떠올리자 또 그 밤하늘이 보고 싶어졌다(하지만 미노루는 운전을 하지 못한다). 손목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이다. 이른 저녁을 먹고 출발해도, 가장 아름다운 깊은 밤의 별을 바라보기에는 시간이 넉넉하다. 셔츠의 가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 미노루는 오타케가 보낸 메시지를 띄우고, 문자를 보냈다. 안 돼, 라는 오타케의 회신이 왔다. 매정하다. 외출하고 돌아오는 아내를 데리러 역으로 나갔다가 둘이 슈퍼마켓에 들러 장을 봐야 한단다. “어린애도 아닌데 그렇게 갑자기 말하면 안 되지. 난 데 없이.” 그러나 미노루 생각에, 이런 일은 갑자기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른이니까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뭐 때문에 어른이 됐겠어” 하고. “적어도, 별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지.” 오타케는 그렇게 대답한다. “왜. 별이 얼마나 예쁜데.” 한숨 소리가 들렸다. “너 말이야, 좀 더 어른이 될 수 없냐. 부탁이다.” 미노루에게 그 말은, 나기사를 떠오르게 한다. 부탁할게, 좀 더 어른답게 굴어. 나기사는 수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