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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의 피아니스트
공사장의 피아니스트
저자 : 나윤아
출판사 : 뜨인돌출판사
출판년 : 2013
정가 : 10000, ISBN : 9788958074304

책소개


우리나라 십대들의 답답한 현실과 갈등,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희망이 절묘하게 조합된 성장 소설이다.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라지만, 사실 아파도 그냥 가야 하는 게 십대다. 꿈이라는 단어는 대학교 간판과 직업이라는 단어와 동의어가 된 지 오래.

뭔가 생각할 겨를도,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입시 시장에 내던져져 아파하고 있는 게 십대다. 『공사장의 피아니스트』는 힘겹게 살고 있는 우리나라 십대들에게 남이 강요하는 꿈이 아닌 새로운 꿈의 의미를 보여 주는 소설이다.

청소년 소설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인터넷 소설과 교훈거리를 대놓고 드러내는 소설 사이에서 길을 헤맬 때가 많다. 그런 와중에『공사장의 피아니스트』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현실적인 소재,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흡인력 있는 전개를 통해 청소년 소설이 가야 할 좋은 예를 보여 준다.

목차


박하가 서 있던 곳의 모래 먼지가 다시 떠올랐다.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그런 곳은 엄마가 혐오하는 악의 구렁텅이였다(엄마는 그런 장소들을 ‘악의 구렁텅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고수익과 안정성이 보장된 일을 해야 한다고 엄마는 누누이 말해 왔다. 그게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닦아 놓은 길 위를 열심히 달려왔다. 하지만 난 아직 엄마가 말하는 ‘행복’을 찾지 못한 것 같다. 해가 갈수록 행복이란 놈의 행방은 묘연해지기만 했다. 그런데 박하는 우리 엄마가 그토록 경고하던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혜영이는 ‘흑건’을 잘 모르지만, 수지의 연주는 악보를 스캔한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자기만의 색깔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냥 ‘똑같은’ 정도가 아닌, ‘한 치의 오차도 없을 정도’로 악보에 충실한 연주는 사실 경이로운 것이었다. 콩쿠르에서는 그런 연주법이 더없는 환호와 찬사를 받았고, 수지는 늘 깔끔하게 대상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박하는 낯선 방법으로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원곡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묘하게 달랐다.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의 흑건과 분명하게 다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쇼팽의 흑건이 아니라 박하의 흑건이었다.
가슴속이 일렁거렸다. 박하를 비추는 조명만큼이나 또렷하고 밝게 넘실거리는 무언가가 혜영이의 속을 휘저었다

그리고 오디션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최수지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걔 미친 거 아니야? 웬 배우 오디션?”
“요즘 우리 학교 애들 왜 이런다냐. 박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최수지까지?”
“냅둬라. 박하야 그렇다 치고, 최수지는 자기 무덤 파는 거야. 나중에 대학에 똑 떨어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혜영이는 아이들을 힐끔 노려보았다.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소심한 성격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사실 자기도 수지한테 질투도 하고 영 못마땅했으니까.
“근데 걔 노래 좀 되더라. 피아노만 붙들고 늘어지는 줄 알았더니.”
“잘하는 거, 좋아하는 게 뭐가 중요하냐. 대학 마크가 중요하지. 넌 한국에서 학교를 12년째 다니면서도 모르냐.”
이토록 무거운 대화를 하면서 여자애들은 까르르 웃었다. 저 애들이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건 딱히 좋아하는 일이 없기 때문일 거라고 혜영이는 생각했다. 자기가 간절히 바라는 그 일이 아닌 전혀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 아쉬움, 괴로움이 저 애들에겐 없는 것이다. 혜영이는 그 애들이 조금은 부러웠다.

언제부터인가 엄마가 누누이 강조했던 ‘악의 구렁텅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돈은 코딱지만큼 주면서 온갖 고생스러운 일은 다 시키는 ‘악의 구렁텅이.’ 행복한 미래는 찾아볼 수 없는 곳.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기 위해서 꼭 의사, 간호사, 약사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엄마의 지극한 충고들.
“뭐, 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이 정도는 참아 줘야지.”
‘하고 싶은 거? 그게 뭔데? 피아노? 웃기지 마. 아무리 피아노를 잘 쳐도 이런 데서는 쥐꼬리만 한 기회도 못 만나. 좋은 대학 가서, 그래서….’
혜영이는 생각 끝에 짜증이 치솟아 시선을 돌렸다. 박하는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혜영이에게 공책을 툭 밀었다.
“마흔이나 쉰 정도 되면 피아니스트, 될 수 있지 않겠냐?”
혜영이는 공책을 다시 박하 쪽으로 밀었다.
“아니, 그러다가는 평생 가도 힘들걸? 부모님이 빵빵하게 밀어 주는 실력 좋은 애들이 깔렸으니까.”
“상관없어. 난 그냥 피아노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박하가 빙긋이 웃었다.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곧고 강직한 눈이 불편했다. 난 한 걸음 내딛기도 불안한데, 얘는 너무나 쉽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말한다. 꼭 자신이 바보 멍청이가 된 것 같았다.

처음 나를 음악실에 데려가던 날, 누나는 자랑이라도 하듯이 피아노를 보여 주었다. 누나는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거대하고 반질거리는, 마치 꼭 고래 같은 몸통에서 퍼져 나오는 매혹적이고 섬세한 멜로디는 심장의 어딘가에서 시작되는 한숨 혹은 미소 같았다. 연주가 끝나고 누나는 “어때?” 하고 물었지만 내 머릿속은 누나의 노래가 아닌 다른 것으로 가득했다. 피아노에 대한 내 열병이 시작된 건 바로 그때부터다.
내가 피아노에 관심을 보이자 누나는 자주 나를 음악실에 데려가서 피아노를 치게 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는 내게 있는 재능을 알아차렸다. 물론 나는 그게 재능인지 몰랐고, 지금도 딱히 재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난 그냥 그 검은 악기를 연주하는 게 좋았고, 내 손끝에서 터져 나오는 힘 있는 음정들이 좋았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누나는 내 재능을 키워 주고 싶어 했다. 자신이 느끼는 좌절감을 나에게까지 맛보도록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