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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에이
저자 : 하성란
출판사 : 자음과모음
출판년 : 2010
정가 : 12000, ISBN : 9788957075173

책소개


벼랑 끝에 서 있는 우리, 어디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할까.
하성란이 10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A』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하성란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 정밀한 묘사로 정평이 나 있는 작가답게 작가 특유의 치밀한 구성과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대양 사건’을 모티프 삼아 한 시멘트 공장에서 일어난 의문의 집단 자살을 중심으로 미궁에 빠진 사건의 진짜 이유들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많은 등장인물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얽히고설킨 비밀을 하나씩 파헤쳐가는 과정을 그려 다소 복잡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탄탄한 플롯을 지켜가며 작품의 속도감과 긴장감을 유지해 간다.

'신신양회'라는 시멘트 공장에는 오랜 세월 함께 일하고 살아온 여덟 명의 여자가 있다. 공장을 만든 장본인이자 사장인 여자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자매처럼 지내는 일곱 명의 여자들은 미혼인 채로 아이를 낳아 키우며 공장 기숙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어느 날 또 다른 공장 직원들과 함께 모두 교살된다. 하지만 그들의 시신에는 저항의 흔적이 없다. 이는 그녀들이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이 참혹한 사건의 진실은, 그들의 자녀들이 사건 이후 3년 뒤 재회하여 다시 예전의 공동체 생활을 꾸리고 신신양회를 재건하면서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한다.

그 진실을 향해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들의 죽음과 그들의 비밀이 단지 그들만의 사연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님이 밝혀진다. 작가는 그 과정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향해 끝없이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처절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한 상대 남자도 모르게 아이를 배고 낳아서 기르는 젊은 ‘엄마’들의 자족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우리 시대 결혼제도와 성 풍속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는가. 소설 속에, 아니 소설이 끝난 후에도 작가가 던지는 의미있는 질문은 여전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남아 있다.

목차


몇 시쯤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수없이 자고 깨었기 때문에 며칠이 흘러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락방 안은 묘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인기척이라고는 나지 않았다. 고요함 속에서 누군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마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누군가가 무거운 부대 자루 같은 것을 질질 끌고 있었다. 둔탁한 것 위에 또 다른 둔탁한 무언가가 포개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쉭쉭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누, 누구세요?” --- p.50

엄마와 이모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경찰은 모든 시신들에서 저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 이모들답지 않았다. 이모들은 공장을 드나드는 거친 사내들을 상대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땐 상대가 누구든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올려다보았다. 죽음이 코앞에 있었더라도 이모들이라면 대들고 보았을 것이다. 엄마 성깔이라면 죽을 때 죽더라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중략)… 이모들은 그날, 그곳을 자신들이 죽을 시간, 장소라고 믿었던 것 같다. 엄마는 죽으면서도 내게 안녕,이라는 짧은 인사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 pp.120~121

나는 그날 그 아수라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나는 눈뜬장님이었지만 대신 두 귀로 피부로 냄새로 내 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을 다 보았다. 나는 죽음의 아우라를 보았다. 죽음이 커다란 외투처럼 이모들 몸에 드리우는 것을 보았다. 이모들의 코와 입으로 가느다랗게 생명이 빠져나오는 것도 보았다. 우리의 몸에 깃들어 우리를 움직였던 생명은 누군가 한 모금 깊이 빨고 천천히 뱉어내는 담배 연기처럼 가느다랬다. --- p.153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들. 누군가를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이 상실이나 금기를 뜻한다면 신신양회집 아이들에게 아버지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단어였다. 모든 단어들이 관계 속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어머니’, ‘어머니’라는 단어는 ‘아버지’가 있어 힘을 얻게 되지만, 우리들에게 엄마, 어머니란 단어는 독립적인 단어였다. 이모들은 자신들이 만나고 사랑했던 남자들, 결국 신신양회집 아이들 중 누군가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남자들에 대해 언제나 웃고 떠들며 이야기했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아버지와는 무관한 다른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모들에게 남자들이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존재로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거였다. 이모들 또한 바람과도 같아서 그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았다. --- p.164

신신양회 사건은 스물세 명의 신도를 교살한 ‘삼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마무리가 된 사건이었다. 온갖 언론에서 호들갑스럽게 사건을 보도했지만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사망한 이상 진실을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건이 두고두고 회자되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도 그 이유였다. 죽은 자들은 있는데 그들이 왜 죽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억측과 추측도 잠시뿐이었다. 메아리가 없는 외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 누구도 사교도들의 집단 난동이라는 경찰의 발표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