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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의 왕오천축국전 2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2
저자 : 혜초
출판사 : 학고재
출판년 : 2008
정가 : 5500, ISBN : 9788956250755

책소개


『왕오천축국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 책이자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여기서 '천축'은 인도를 가리키는 중국식 옛 이름이다. 따라서 이것은 '오천국을 다녀온 기록'으로 볼 수 있으며, 신라 승려 혜초가 인도를 포함한 중앙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보고들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원본은 한자로 6000자, 10쪽 분량의 단촐한 분량. 그러나 이 분야 권위자인 정수일씨의 노력으로 인해 400쪽에 달하는 상세한 주석과 해제가 실려 있어 일반인들로서도 책을 읽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특히 저자는 혜초가 언급한 나라들의 왕조사와 문명사 그리고 현재 그곳이 어떤 지역인지까지를 확인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천축국에서는 죄를 지어도 돈으로 벌금만 내면 해결이 가능했다는 이야기 등 인도와 중앙아시아 중세의 여러 모습들이 담겨 있다. 더불어 혜초가 지었다는 시 역시 실려 있어 이역에서 쓸쓸한 밤을 보내고 있는 혜초의 심정을 헤아리기도 한다. 『대당서역기』와 『이븐 바투타 여행기』에 필적할 만한 재미있는 책이다.

*이 도서는 작고 가벼운 판형의 특별보급판이며, 내용은 동일합니다.

목차


2. 주석에서

<가장 원문의 뜻에 가깝고 정확한 번역>

역주자는 기존에 나온 국내외 『왕오천축국전』 번역서와 연구서를 비교하고 그 중에서 해석이 판이하게 다른 부분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관련 서적과 그 시기 그 지역의 상황을 근거로 원문을 복원하여 가능한 한 정확한 번역을 시도한다.

이 문장 중 ‘석(石)’자 앞의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와 또 같은 글자인 ‘오일(五一)’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라서 논란거리이다. ‘석’자 앞의 글자를 ‘오(五)’자로 보는 견해(藤, 12a; F, 459; 羽, 613; 李, 96)와 ‘오일(五一)’자로 보는 견해(Y, 41, 83; 鄭, 105)가 있는가 하면, 특이하게도 ‘일(一)’자로만 보는 학자(張, 28)도 있다. ‘오’자로 보는 학자들은 예외 없이 ‘다섯 섬을 왕에게 바친다’로 번역하였다. ‘오일’자로 보는 경우에는 ‘다섯 섬 중 한 섬을 왕에게 바친다’로 번역하기도 한다(桑, 31). 이색적인 것은 ‘오일’로 써놓고도 ‘다섯 섬을’로 옮겨 놓은 경우다(鄭, 105, 116). 그러나 당시 인도의 지세가 수확의 6분의 1을 공납하는 세제임을 감안할 때, ‘오일’로 인정하고 ‘땅에서 나는 곡식의 다섯 섬은 거두어들이고 한 섬은 왕에게 바친다’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 (171∼172쪽에서)

<정수일 선생만이 달 수 있는 자세하고 풍부한 주석>

혜초가 젓가락을 사용하는 식습관이나 근친혼, 일처다부제와 같이 서역의 풍습을 묘사한 부분에 대해 역주자는 주석에서 부연 설명을 해준다.

유목 생활 유습으로 인해 아랍인들은 자고로 맨손(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관행이다. 간혹 국 같은 것을 먹기 위해 숟가락은 사용하나, 한(漢) 문명권 사람들처럼 젓가락〔힅〕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짐작하건대 혜초는 꼬치구이를 즐기는 아랍인들이 사용하는 꼬챙이 같은 것을 젓가락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대식인들이 수저를 쓰는 것이 그에게 ‘퍽 흉하게 보였던’ 것이다. ---(366쪽에서)

혜초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는 ‘최근친혼(最近親婚)’을 ‘대단히 고약한 풍속(極惡風俗)’이라고 질타한다. 최근친혼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신봉자들을 비롯해 일부 민족들 속에서도 유행한 일종의 혼인 제도이다. 최근친혼을 비롯한 근친혼은 자고로 여러 민족들 속에서 혈통이나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혼인 비용에 의한 재화의 족외 유출을 방지하며 여자의 사향심을 달래기 위함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 존재해왔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발단이 된 이 혼인 제도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헤로도토스(Herodotos)인데, 그는 역작 『역사(Historia)』 제9권에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Cyrus)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에 관해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캄비세스 이전까지는 여형제를 아내로 취하는 관습이 페르시아에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캄비세스는 자기의 여형제 중 한 명을 사모하여 구애하고 싶었으나, 이것이 관습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궁전 법관을 불러다가 여형제의 취처(娶妻)를 인정할 수 있는 법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왕자의 속내를 알아차린 법관은 법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왕자의 미움도 받지 않을 만한 묘안을 찾아내야 했다. 생각 끝에 법관은 여형제와의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법률은 없지만, 왕에게는 원하는 대로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는 타면법(他面法)도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왕자는 그 여형제를 아내로 취하고 얼마 안 있다가 또 다른 여형제도 아내로 맞이했다. ---(389쪽에서)

‘공취일처(共娶一妻)’, 즉 여럿이 한 여인을 아내로 삼는 이른바 ‘일처다부(一妻多夫, polyandry)’도 일종의 혼인 제도로, 자고로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성행하였다. 『수서』 「서역전」에 의하면 토화라국에서는 형제가 한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데, 방사(房事)가 있을 때면 방 밖에 옷을 걸어 표지하며 자식은 형에게 속한다. 그런가 하면 대월지 종족에 속하는 염달은 그 풍속이 돌궐과 비슷하여 형제가 아내 한 명을 취한다. 만일 형제가 없으면 처는 각이 하나인 모자를 쓰고 형제가 여럿이면 그 숫자만큼 각이 달린 모자를 쓴다(『위서』 「서역전」). ---(389∼390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