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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영화평론집 세트
정성일 영화평론집 세트
저자 : 정성일
출판사 : 바다출판사
출판년 : 2010
정가 : 45000, ISBN : 9788955615470

책소개


시네필의 대부 정성일, 그의 첫번째 영화 평론집

영화감독 프랑소와 트뤼포는 시네필을 세 가지 단계로 규정하였다. 첫 번째, 영화를 두 번 볼 것. 두 번째, 영화에 대한 글을 쓸 것. 세 번째, 영화를 직접 찍을 것. 두 번째 단계에만 줄곧 머물러 있던 시네필의 대부 정성일이 2009년 영화「카페 느와르」로 시네필의 요건을 모두 충족 하더니, 2010년에는 영화 평론 시작한지 26년만에 첫 번째 영화평론집을 냈다. 그것도 두 권을 동시에.

99호에서 폐간 되 버린 영화잡지 「키노」를 이끌며 수많은 시네필과 '정성일 키드'를 양성했던 정성일. 그 없이 90년대 시네필 문화를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는 항상 많은 영화를 보지 말고, 좋은 영화를 여러 번 보라고 시네필들에게 권유한다. "영화가 나빠지는 걸 본 다음에는, 세상이 나빠지는 걸 보게 될겁니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에게 좋은 영화를 사랑할 것을 주문한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것이다』는 세계 영화에 대한 정성일의 우정을 보여주는 평론집이다. 책은 영화를 생각하는 '좌표', 세상을 경험하는 '감각', 영화로부터 구하는 '배움에'관한 글 38편과, 정성일이 올드독 정우열에게 보내는 '우정의 프롤로그', 「카페 느와르」를 찍은 후 그의 영화 글쓰기에 관한 새로운 0도라고 할 수 있는 '자문자답일심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은 장철, 오즈 야스지로, 허우샤오시엔, 구로사와 기요시, 차이밍량, 가와세 나오미, 지아장커 등 그의 영화 친구들에게 보내는 헌사다.

『필사의 탐독』은 21세기 첫 십 년동안 탄생한 한국 영화 중에서 새로운 '질문'을 보여준 작품을 중심으로, 그 낯설고 매혹적인 경향을 탐독한다. 질문을 견디며 세상을 끌어안는 정성일의 영화적 사투. 정성일은 영화 작가의 수 만큼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2000년대 첫 십년, 우리는 많은 세계를 봐왔다. 홍상수의 세계, 김기덕의 세계, 박찬욱의 세계, 봉준호의 세계... 그러한 세계를 정성일은 바라보고 펜을 든다. 영화가 한낱 오락거리로 전락한 이 시대에 『필사의 탐독』은 수많은 세계 속에서 잠시 멈춰서 한국 영화를 들여다보고, 산책하면서 볼 것을 주문한다.

목차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평론집 두 권이 출간되었다!

한 명의 비평가가 시네필 문화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는 건 과장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정성일은 영화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에 태어나 ‘90년대 시네필 문화’를 낳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잡지 《키노》를 이끌며 영화 담론의 지층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시네필의 윤리와 평론가로서의 자의식을 고민하는 그가 영화평론을 시작한 지 26년 만에 첫 평론집을 냈다.

그는 첫 평론집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를 내면서 누군가와 함께 영화에 관한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그의 선택은 지구상에서 영화를 가장 사랑하는 강아지 ‘올드독’의 지혜를 가까이 두는 것(올드독은 만화가 정우열의 페르소나 캐릭터이다). 정성일과 ‘올드독’ 정우열은 영화라는 세상이 우리에게 준 우정에 대해서 글로서, 그림으로서 아름다운 합주를 선물한다. 《필사의 탐독》은 21세기 첫 십 년 동안 탄생한 한국 영화 중에서 새로운 ‘질문’을 보여 준 작품을 중심으로, 그 낯설고 매혹적인 경향을 탐독한다. 질문을 견디며 세상을 끌어안는 정성일의 영화적 사투. 영화를 잠시 멈춰 세우고 처절하게 싸우면서 사유의 시간을 만들어 내는 《필사의 탐독》은 지금-여기의 한국 영화를 들여다보고, 산책하면서 던지는 지독한 질문이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와 《필사의 탐독》은 정성일의 평론집을 애타게 기다린 독자들에게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며, 비평이 점점 더 영화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는 데 동원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첫 번째 평론집
그리고 ‘올드독’ 정우열과의 멋진 영화적 듀엣!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
우리는 그것을 영화라고 부른다.”


“영화에 관한 첫 번째 책을 묶으면서 나는 이 책을 어떤 주제, 어떤 토픽, 어떤 시기, 어떤 감독, 어떤 테마에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만일 이 책에 실린 글들을 묶는 유일한 고정점이 있다면, 그건 우정이다. 영화에 대한 나의 우정, 영화가 내게 준 우정, 영화를 둘러싼 우정. 오로지 영화만이 내 삶을 외롭지 않게 곁에서 안아 주었다. 나는 이 책을 만들면서 내가 맛본 우정을 담고 싶었다.”-책머리에 중에서

세상에는 많은 영화평론가가 있다. 그러나 개별 작품의 비평을 넘어 영화 매체와 우리 삶의 관계를 고민하고, 위기와 한계와 오해에 직면한 영화, 버림받은 영화의 운명을 끊임없이 방어하며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평론가는 손꼽는다. 올해로 26년째 영화평론가로 살고 있는 정성일. 영화의 운명은 곧 그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는 《로드쇼》와 《키노》의 편집장으로서 한국 사회의 새로운 시네필 문화를 형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지난해에는 자신의 첫 장편영화 〈카페 느와르〉를 찍었다. 여전히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영화를 기다리며 세상에 대한 믿음을 늦추지 않는 시네필의 ‘큰형님’, 영화계의 ‘전사戰士’ 정성일. 이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는 그의 첫 평론집이다.

정성일은 임권택 감독에 관한 두 권의 인터뷰집 등 그동안 여러 책을 엮거나 함께 쓰기는 했지만 단독 평론집은 처음이다. 왜 지금까지 정성일은 영화평론집을 한 권도 내지 않은 것일까? 그는 시간을 견디는 것은 영화이지 평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평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늘 새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 책을 낸다는 것이,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사유의 정지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굳이 내야 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지금까지 평론집 출간을 미뤄 온 이유의 전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평론집을 기다렸다. 그의 평론집이 없다는 사실을 의아해했다.

어쩌면 정성일은 첫 평론집을 내면서 죽음, 혹은 정지에 저항하는 책을 상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가 자신에게 준 우정과 기쁨의 순간을 그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영화를 둘러싼 우정을 고스란히 책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그는 지구상에서 영화를 가장 사랑하는 강아지 ‘올드독’의 지혜를 자신의 글 가까이에 두고자 했다(“이 지혜로운 강아지는 종종 영화의 핵심을 건드리면서도 시침 뚝 떼고 모르는 척 영화 대신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고, 가끔은 영화를 말하면서 삶의 진실을 만진다. 나는 올드독의 그림을 볼 때마다 종종 감동을 받는다. 그건 전적으로 영화를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오는 지혜이다. 나는 그 지혜를 내 글 곁에 두고 싶었다. 이것이 내 솔직한 욕심이다”-책머리에 중에서). 올드독은 만화가 정우열의 페르소나 캐릭터이다. 정우열은 정성일을 자신의 ‘영화적 아버지’라고 고백하며 그를 향한 존경과 우정의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제 정성일과 ‘올드독’ 정우열은 영화라는 세상이 우리에게 준 우정에 대해서 글로, 그림으로 이야기한다.

영화를 경유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
“세상과 영화 사이의 배움, 나는 그것을 고백하고 싶었다”


책은 영화를 생각하는 ‘좌표’, 세상을 경험하는 ‘감각’, 영화로부터 구하는 ‘배움’에 관한 글 38편과, 정성일이 올드독 정우열에게 보내는 ‘우정의 프롤로그’, 〈카페 느와르〉를 찍은 후 그의 영화 글쓰기에 관한 새로운 0도라고 할 수 있는 ‘自問自答-心情’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우열은 이에 남다른 고심과 망설임으로 영화적 발견의 순간을 카툰과 일러스트로 화답한다.

좌표
예술 혹은 매체로서의 영화 그 자체를 사유하는 글 11편이 실려 있다. 주로 시네필의 윤리와 임무, 평론가의 애티튜드를 지속적으로 질문하는 글들이다. 영화 담론의 위기와 이에 대한 근심을 피력하는 글 “영화비평에 대한 근심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시작으로, 영화광을 호명하는 사회적 방식과의 투쟁, 영화가 담고 있는 세상이라는 질문, 위대한 예술의 전통 속에서 생각해 보는 영화의 존재론, 우리가 지금 아시아 영화를 상상해야 하는 이유, 영화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윤리의 문제 등에 대한 글들이 펼쳐진다.

감각
세상이라는 살과 감정을 어루만지는 하나의 촉수가 되어 깨달음을 주는 영화적 순간에 관한 글 12편이 실려 있다. 저자의 유년 시절의 스펙터클이었던 장철 영화에 바치는 막무가내 고백담, 타인의 영화적 취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스타를 즐기는 방식에 관한 고찰, 오즈 야스지로가 지속을 포기하? 기어이 쇼트를 나눌 때 깨닫는 세상의 질서,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라는 가르침을 준 구로사와 아키라에 대한 기억, 홍상수와 에릭 로메르의 영화가 교차하고 엇갈리는 지점에 대한 흥미로운 목격 등이 펼쳐진다.

배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 작가들에게 바치는 오마주이자 그들로부터 구하는 배움에 관한 글 13편이 실려 있다. 로베르 브레송,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장 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 테오 앙겔로풀로스, 오즈 야스지로, 허우샤오시엔, 구로사와 기요시, 차이밍량, 가와세 나오미, 그리고 채플린. 여기에 실린 글들은 ‘영화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하나의 답이 되어 준 세계에 대한 우정 어린 고백이자, 지지와 동조이다.

두 개의 인터뷰, 그리고 “自問自答-心情”
좌표와 감각 사이, 감각과 배움 사이에 간주곡 형태로 지아장커, 장률과의 인터뷰가 자리한다(“間-지아장커와의 대화”, “間-장률과의 대화”). 이 두 개의 인터뷰는 나쁜 세상 속에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용기가 필요한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정성일이 〈카페 느와르〉를 찍은 후 처음으로 쓴 글로, 영화를 연출한 이후 영화비평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웅변하는 “自問自答-心情”이 책의 마지막에 놓인다. 정성일은 〈카페 느와르〉 11회 차 촬영 현장에서 생각하지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감독으로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 하지만 그 결단이 성립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 “自問自答-心情”은 그날의 시행착오와 배움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 영화를 쓴다는 것과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영화의 역사(로셀리니, 히치콕, 에이젠슈테인, 오즈 야스지로, 고다르, 타르코프스키……) 안에서 구하는 긴 호흡의 독백이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책의 제목은 철학자이자 영화를 사랑한 들뢰즈가 쓴 글에서 빌려 온 것이다. 정성일은 들뢰즈의 글과 생각으로부터 많은 배움을 얻었고, 세상과 영화 사이의 배움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표했다. 그는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그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며,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고 단언한다. 시네필들의 미치광이 같은 사랑이 돈 후안의 사랑과 갈라서는 지점이 바로 거기라고 말한다.

행동을 완수하기 위해서 죽음의 시간으로 들어서는 듯한, 거의 목숨을 건 영화 읽기. 정성일의 평론집을 기다려 온 독자들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완전히 새롭게 생각할 기회를 마련해 준 정성일의 ‘열정 혹은 수난’으로부터 영화를 사유하는 계기와 시간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을 견디며 세상을 끌어안는 정성일의 영화적 사투
새로운 세기 첫 십 년의 한국 영화를 탐독하다!

“질문은 우리들의 시작이다.
나는 지치지 않고 몇 번이고 이 자리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 책은 21세기 한국 영화의 첫 십 년에 관한 연대기 혹은 영화사 안으로의 개입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다루려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실패를 각오하고 그 틈새의 시간 사이에서 나 자신을 향해서 끌어내는 대답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이 말을 부정적인 제스처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기쁨에 차서 노래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영화에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떤 영화의 명령에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나는 그들의 고유함을 지키기 위하여 방어할 것이다. 그런 다음 기꺼이 공존의 방법을 찾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영화들은 각자의 독립된 항이기 때문이다.”-프롤로그 중에서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평론을 쓴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트뤼포의 ‘영화광의 3단계’ 테제를 자주 인용한다. 트뤼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광이 되는 데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어. 첫 번째,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한 번 보는 거야. 두 번째, 이번에는 두 번 본 그 영화를 글로 써보는 거지. 세 번째, 영화를 보고, 썼으면, 이제는 직접 영화를 찍어 보는 거야.” 영화를 가슴에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선언과도 같은 이 유명한 이야기로 정성일은 몇 번이고 되돌아간다. 그리고 영화를 본다는 것과 쓴다는 것, 결국 영화를 찍는다는 그 결사적인 동사動詞의 활동이 위기와 곤경과 오해에 처한 영화를 여전히 방어하는 힘일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를 멈춰 세우고 처절하게 싸우면서 생각할 시간을 만들어 내는 ‘필사의 탐독’. 지금-여기의 한국 영화를 들여다보고, 산책하면서 구하는 ‘필사의 배움’. 정성일의 《필사의 탐독》은 21세기 첫 십 년 동안 탄생한 한국 영화 중에서 새로운 ‘질문’을 보여 준 작품을 중심으로, 그 낯설고 매혹적인 경향을 치열하게 읽어 내고 있다. 저자는 20세기 영화와의 작별을 고하는 故정은임에 관한 글로 책의 문을 열고, 이어서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 임권택, 이창동, 김기덕, 임상수, 허진호, 윤종찬, 곽경택, 이준익, 장률, 정재훈의 영화를 끌어안고 영화적 사투를 벌인다.

정성일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는 결국 질문하는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 질문을 견뎌야 한다. 그리고 대답해야 한다. 《필사의 탐독》은 필름이 파일이 되어 가고, 극장이 아닌 방 안에 누워 영화를 보는 21세기 영화적 환경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자, 각자의 영화가 가진 고유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이다. 그는 지치지 않고 영화를 보는 자리, 쓰는 자리, 찍는 자리로 되돌아가 영화를 사유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막 본 영화를 미래의 영화의 자리에 올려놓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영화. 이 책은 20세기 영화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영화의 중간지대에 서서 영화라는 세상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지독한 대답이다.

‘한국 영화’라는 아름다운 근심!
연대기 혹은 영화사가 아닌, 미래로 나아가는 한국 영화에 대한 짧은 기록


영화를 보는 매 순간의 내기, 영화를 본다는 기쁨과 글을 쓴다는 불안감의 교차. 무엇보다 ‘한국 영화’라는 아름다운 근심. 정성일은 여기에 실린 글들이 자신의 말실수이자 영화에 가 닿으려고 했던 그 모든 노력이었다고 말한다. 영화에 대한 돈키호테적인 노력. 위험을 무릅쓰고 다가가서 찔리고 피를 흘리는 모험을 통해서만 한 뼘 좁힐 수 있는 영화와의 거리. 그야말로 ‘비평 활극活劇’. 정성일은 영화가 우리에게 베풀어 준 즐거움의 부채를 갚기 위해서 이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는 쪽이다. 그것이 예의라고까지 말한다.

책에 실린 글은 2001년 8월에 쓴 윤종찬의 〈소름〉에서 2010년 1월에 쓴 정재훈의 〈호수길〉까지의` 궤적을 담고 있다. 십 년 동안의 한국 영화 중에서 무엇을 넣고 뺄지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는데, 저자는 여기에 실린 글들이 선택되지 못한 영화들을 포함하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총 17개를 선별했다. 이 글들은 다시 손봤기에 제목과 내용이 글이 발표됐을 당시와 다소 다르다. 글은 대개 촘촘한 영화읽기이지만, 때로는 인터뷰 형식도 끼어들고(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 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방문한 후 기록한 일종의 영화 기행문 형식도 끼어든다(임권택의 〈취화선〉, 장률의 〈이리〉).

저자가 프롤로그에서도 밝히고 있듯 이 책은 21세기 첫 십 년 동안의 연대기 혹은 영화사가 아니다. 한국 영화라는 카테고리 바깥에 위치한 글도 있다(월드컵 미장센). 이것은 단지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과정 중의 (한국) 영화에 대한 짧은 기록이자, 애정과 근심의 시선이다. 그러므로 이 ?의 마지막 글인 정재훈의 〈호수길〉은 자연스레 2010년대에 나타나게 될 영화들과 연결되어 있다.

홍상수, 임권택, 박찬욱, 봉준호, 장률, 김기덕……을 그냥 흘려보낼 것인가
필사적으로 마주하여 기필코 하나의 세상과 징후와 경향을 발견할 것인가


17개의 글은 각 글을 관통하는 가장 큰 질문을 제목으로 취하고 있다. 세상을 떠난 영화친구 정은임에게 보내는 ‘애도’의 편지를 시작으로,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은 89씬 117쇼트가 기억을 놓고 ‘순열’되는 방식을 추적한다. 김기덕의 〈해안선〉은 ‘유령’처럼 그의 영화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거나 반복해서 되돌아오는 무의식을 읽어 내는 글이다. 이창동의 〈오아시스〉는 ‘판타지’라는 기만적인 환영술에 대한 해부이며, 임권택의 〈취화선〉은 저자가 100일 동안 촬영 현장에서 영화가 탄생하는 순간의 비밀을 엿보면서 구한 ‘배움’에 관한 글이다. 윤종찬의 〈소름〉은 죄의식의 채워지지 않는 ‘구멍’을 읽어 낸다. 홍상수의 〈극장전〉은 ‘구조’의 미학을,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는 미학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묻는다. 봉준호의 〈괴물〉은 ‘괴물적인 것’의 정치적 읽기를 요구하며, 곽경택의 〈태풍〉과 윤종찬의 〈청연〉에서는 자살적 제스처의 ‘악순환’을 진단한다. 김기덕의 존재론은 김기덕이 한국 사회의 억압의 메커니즘 속에서 어떻게 ‘희생양’의 자리에 가게 되었는지를 탄식하는 글이다. 월드컵 미장센은 스포츠 중계의 수사학을 통해 이미지의 ‘스펙터클’이라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허진호의 〈외출〉은 불륜이라는 사랑의 ‘얼룩’에 관한 모호한 관찰기이며,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들〉은 역사 안에서의 ‘무능력’과 무관심을 읽어 낸 글이다, 이준익의 〈님은 먼 곳에〉는 ‘모순’이라는 난처한 상황과의 직면을, 장률의 〈이리〉는 영화를 찍기 위한 운명론적인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정재훈의 〈호수길〉은 부서져 가는 집을 바라보며 ‘긴급함’을 호소하는 영화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결국 글의 제목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 혹은 저자가 영화에서 읽어 낸 경향과 징후이다. 정성일은 점점 더 쇼트와 씬과 시간에 몰두하면서 영화를 잘게 쪼갠다. 글에서는 씬 넘버와 쇼트 넘버가 넘쳐 나고, 쇼트의 크기와 시간이 문제가 된다. 그러는 중에 쇼트라는 세상, 씬이라는 세상이 던지는 질문과 만난다.

정성일은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절망이자 농담이다”라는 카프카의 말을 떠올리면서 거기에 감도는 모든 도움으로부터의 단절을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사유를 거기서 시작한다고 믿는다. 가짜 해석이 범람하고, 점점 더 영화를 부정하는 데 동원되고 있는 비평 담론의 풍경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기꺼이 영화를 껴안으려는 비평가의 영웅적인 노력. 산꼭대기로 밀어 올린 바위가 정상에 닿으면 다시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계속 그 행위를 반복하는 시시포스처럼, 정성일은 실패를 각오하고, 어떤 의도도 갖지 않고 다시 영화 앞으로 되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