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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세계
저자 : 무라타 사야카
출판사 : 살림
출판년 : 2017
정가 : 13000, ISBN : 9788952237019
책소개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자,
무라타 사야카가 꿈꾸는 ‘유토피아’
“이곳은 ‘여성과 남성’ ‘결혼과 비혼’ ‘임신과 출산’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가치가 소멸하는 신세계다”
제155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편의점 인간』의 작가, 무라타 사야카의 2015년작으로 아쿠타가와상 수상 당시 아마존 순위를 역주행하며 다시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잔혹한 배경과 달리 작가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사회적 편견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남성이 전쟁터로 징용되면서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극단적으로 줄어든 ‘평행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섹스를 통해 아이를 낳지 않고, 결혼도 프로그램에 원하는 조건을 넣으면 ‘매칭’시켜주는 상대와 하며, 아이는 인공수정으로만 얻을 수 있다. 비 내리는 여름날 태어난 주인공 아마네(雨音)는 초등학교 시절, 자신이 인공수정이 아니라 ‘남다른 방법’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뒤로 왜 엄마는 ‘교미’를 해서 자신을 낳은 건지, 자신의 진짜 본능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아마네는 사랑과 섹스에 몰두한다. 과연 그녀가 찾아낸 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줄까?
목차
“엄마, 나 라피스와 만나고 싶어.”
나는 엄마에게 애원했다.
“못 만나. 아무 데도 없으니까.”
빨래를 개던 엄마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엄마는 나를 바보 취급하며 실망감을 안겨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못 만나’라는 말이 나의 내장 깊숙한 곳에서 더욱더 뜨거운 열정의 덩어리를 끄집어냈다.
나는 곧 알아챘다.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그 사람은 그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까지 포함해 내가 그 소년을 좋아한다는 걸. 온몸에 불가사의한 아픔과 강렬하게 순환하는 혈액의 감촉은 계속되었다. 사랑이란 이런 욱신거림과 아픔을 온몸에 각인시키는 것임을 알았다.
이때 나는 내가 이야기 속 사람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음을 깨달았다.
--- p.12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했다. 둘 다 영화를 좋아해서 자주 함께 보곤 했는데 그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영화를 보는 게 남편의 버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개를 쓰다듬는 듯했던 그의 손길이 느닷없이 성적인 것으로 바뀐 것이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움직이기 시작한 손에 이상하네, 기분 탓인가, 하고 넘기려 했지만 갑자기 엉덩이와 가슴을 주무르는 것이 아닌가. 당황해 일어서려는 순간, 꼿꼿이 선 남편의 성기가 무릎에 닿았다.
나는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설마 ‘가족’에게 욕정을 느낄 줄이야.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남편의 입이 내 입을 막았고 입안으로 들어오는 혀를 느끼자 욕지기가 치솟았다. 남편의 입에 토사물을 쏟아낸 나는 놀란 그를 밀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토하고, 또 토했다.
--- p.55
“우리나라는 왜 아직도 이성 간의 결혼만 인정하는 걸까. 시대에 뒤처졌어.”
주리의 촉촉한 눈동자가 웃음과 함께 가늘어지더니, 새하얀 눈꺼풀 아래 뚫린 구멍 같은 검은 눈동자가 사라졌다.
“그야 자궁이 여자한테만 있어서잖아. 남남 부부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남녀 결혼은 확 줄어들걸? 남자들도 속으로는 남자끼리 결혼하는 게 마음 편해서 좋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쉽게 변화한다. 지금만 해도 미술실에서 주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고등학교 시절에 비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때보다 섹스를 하는 사람은 더욱 줄어들었다. 아직 인간과 연애하는 사람들이 꽤 있긴 하지만, 우리 아래 세대에서는 그 역시 줄어드는 추세라고 들었다.
--- p.69
‘가족’이라고 말할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분명 이것은 종교다. 그 말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신앙심이 돈독한 신자가 되어간다.
‘가족’ 이야기로 화제가 바뀌자 남편의 안색이 조금 좋아진 것 같았다.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남편을 ‘가족’인 나와 미래의 아이가 구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나는 황홀감에 휩싸였다.
우리는 아이를 낳기 위한 편리한 존재로서 서로를 인식하고 결혼이라는 계약을 했다. 하지만 남편은 단순히 정자를 제공하는 남이 아니었다. 역시 가족이었다. 우리가 시스템 속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안도감이 들었다. 역시 가족 시스템은 단지 편리해서 이용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확고한 유대관계 때문에 이용하는 것이리라.
--- p.95
남자나 여자, 그러한 구분 없이 우리는 모두 인류를 위한 자궁이 된 것이다. ‘정상’이라는 들리지 않는 음악이 우리 머리 위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음악에 지배당하고 있다. 내 몸속에도 어느새 그 음악이 우렁차게 퍼져 나갔다. 그 음악을 따라서 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 ‘아가’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