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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나가사키
저자 : 에릭 파이
출판사 : 21세기북스
출판년 : 2011
정가 : 10000, ISBN : 9788950929022

책소개


2010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수상작.
타인의 집에 숨어 살아야만 했던 한 여성의 놀라운 고백.


'그는 부엌에서 음식물이 사라지는 걸 보고 놀랐다. 남부에 사는 오십대 독신남은 카메라를 설치했다가 웬 낯선 여성이 그가 없는 동안 그의 집 안에서 거니는 걸 확인했다.' 2008년,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집주인 몰래 사용하지 않는 이불 벽장 속에 숨어 산 한 일본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집주인과 주거 침입자의 시점을 각각 다루며 하나의 이야기를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책은 집주인이 주거 침입자를 찾아내 고발하는 이야기로 시작해, 그녀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숨겨진 사연을 밝히는 것으로 이어진다. 소설 초반, 벽장에 숨어 일 년을 산 여자의 이야기는 섬뜩할 정도로 기이하며 소름 끼치는 장면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곳이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작가는 유년 시절의 행복한 기억이 남아 있는 옛집을 찾아온 홈리스 여성의 고백을 통해 마음 놓고 기댈 곳 하나 없는 인간 존재의 쓸쓸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목차


부엌에서도 나는 깐깐할 정도로 주의력을 높여야만 했다. 대개 나는 그 동네 이십사 시간 편의점 뒤쪽 쓰레기통에서 먹었다. 편의점은 유통기한이 막 지난 상품들을 버림으로써 모른 채 나를 먹여 살렸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날이거나 몸이 좀 안 좋을 때는 집주인의 비축 식량에 살짝 손을 댔다. 밥이나 면만 조금 건드렸다. 없어진 걸 그가 알아차릴 만한 건 전혀 손대지 않았다. 거의. 예외적으로 요구르트 하나와 약간의 과일 주스의 유혹에 넘어간 적은 있다. 그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결국 집주인의 취향에 맞춰졌다. 심지어 그의 취향을 좋아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이 남자와 나의 공통점이다. 자부심을 가질 일도, 화낼 일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 이것 말고 우리를 근접시키는 건 없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도 대개 아주 다르다.

매일 저녁 저는 낙관하며 누웠지요. 이건 농담이야. 자고 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이렇게 의미를 상실할 수는 없어. 별, 바람, 인간, 이 모든 게.

어떤 바다거북들은 죽을 때가 되면 태어난 해변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연어들도 바다를 떠나 그들이 자란 곳을 향해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런 습성의 지배를 받나 봅니다. 삶의 긴 주기를 보내고 저는 제가 자란 옛 생물학적 환경 가운데 하나로 되돌아온 겁니다. 팔 년 동안 ‘위대한 발견들’을 했던 곳으로 말이지요.

세상의 모든 헌법에 누구나 자신의 먼 과거의 장소로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불가침의 권리를 집어넣어야 할 거라고 저는 혼자 생각했지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어린 시절을 보낸 모든 아파트와 단독주택과 정원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꾸러미를 맡겨서 이 추억의 겨울 왕궁에서 몇 시간이고 머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런 시간의 순례를 새 집주인들이 막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저는 굳게 믿습니다. 언젠가 제가 정치적 참여를 다시 하게 된다면 이것이 저의 유일한 계획이 될 겁니다. 저의 유일한 공약이 될 겁니다…….

나중에 저는 후쿠오카 대학에 등록할 수 있었습니다.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했어요. 저는 그 무엇에도 매달리지 못했지요. 나중에 서서히 깨달았지만 산사태는 제 안에서 계속되고 있었어요. 산사태는 태풍이 불던 날 시작되어 첫 번째 먹이에 달려들었고, 이제 제 차례가 온 겁니다. 산사태는 서서히 땅속에서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거죠. 그것은 제가 살고 싶었던 삶을 한 자락 한 자락 앗아갔어요. 제가 하는 일마다 제 손에서 앗아갔지요. 저는 세상을 증오하고 특정 단체를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