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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
스윙
저자 : 여태천
출판사 : 민음사
출판년 : 2008
정가 : 7000, ISBN : 9788937407680

책소개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여태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자 2008년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저물녘의 노을, 꼴찌 팀의 마지막 동작 하나하나를 끝까지 지켜보는 열성 팬의 초연한 눈길이 담겨 있는, ‘야구의, 야구를 위한, 야구에 의한’ 작품집이다. 야구 팬이라면 더욱 절절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아주 진하게 농축된 통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진한 애정으로 야구를 이야기했던 시인은 이제껏 없었다. 문학평론가 권혁웅의 지적대로 여태천은 승리하는 경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이미 끝난 경기, 결과가 어찌되든 상관없는 경기를 지속하는 사람들에 대해 쓴다. 시인 최승호는 이를 두고 “회피하고 싶은 인생의 공허를 폭로”한다고 했고, 문학평론가 문혜원은 “삶의 의미 없음을 미학적으로 표현해” 냈다고 평했다. 나아가 서동욱(시인·문학평론가)은 여백이 많은 여태천의 시가 “동요와 격정에서 오는 피로와 집착 없이, 우리 삶의 비극적 국면을 담담하게 들여다보”며 크나큰 위안을 준다고 말했다. 세 심사위원 모두, 야구를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과 심도 있는 철학을 탁월하게 빚어낸 여태천 시인의 단단한 시 세계가 김수영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점에 대해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스윙』을 2008년 제2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목차


■ 소년 야구부원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여기 커피를 끓이다 말고 국자로 우아하게 스윙을 하는 남자가 있다. 홈런의 기억도, 관중석의 환호성도, 땅을 박차던 스파이크도 이제는 희미하다. 하지만 부드러운 스윙, 이 힘차면서도 유연한 동작을 남자의 몸은 잊은 적이 없다. 한 번 야구부원은 영원한 야구부원이다. 스윙은 오늘도 여전히 남자의 존재를 규정한다.

커피 물이 끓는 동안에 홈런은 나온다.
그는 왼발을 크게 내디디며 배트를 휘둘렀다.
좌익수 키를 훌쩍 넘어가는 마음.
제기랄, 뭐하자는 거야.
마음을 읽힌 자들이 이 말을 즐겨 쓴다고
이유 없이 생각한다.

(……)

방금 전 먹었던 너그러운 마음을
다시 붙들어 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7초.
애가 타고 꿈은 그렇게 식는다.

오후 2시 26분 54초,
커피 물이 다시 끓지 않는 시간.
식탁 위로 찻잔을 찾으러 오는 시간.
커피는 아주 조금 식었고
향이 깊어지는
바로 그때
도무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
국자를 들고 우아하게 스윙을 한다.
-「스윙」에서

한때 소년이었던 남자는 생각한다. 언제부터 삶이 “이미 끝난 게임”(「전력 질주」)이 되었을까. 어째서 마운드에 서지 않아도, 배트를 들지 않아도 심장은 계속 뛰는 것일까. 일상과 습관, 그 이상의 것을 찾으려 남자의 마음이 부유한다.

승패와 관계없는 몇 개의 게임이
남아 있었다.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처럼
불펜에서 노닥거리거나
구경 나온 다른 그녀를 위해
우리는 희생번트를 댔다.

(……)

스파이크, 스타킹, 발목……
스탠드의 관중들과 함께
우리는 천천히 사라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맥주 캔이 날아왔다.
더그아웃에서 우리는 진짜 프로였다.
-「더블헤더」에서

게임은 끝났다. 삶은 이렇게 무의미한 연장일 뿐이다. 그런데도 시는 “비관주의”를 넘어 낙천적이고 “낭만적”이기까지 하다.(문학평론가 문혜원) “승패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자!” 따위의 인생론 때문이 아니다. 작품 해설에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혁웅은 “비밀을 알아낸 자의 표정”(「원 포인트 릴리프」)에 주목한다. 오로지 한 타자를 위해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는 쓸쓸함 너머의 어떤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이다. 비밀을 알게 된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그는 “조명 탑의 불빛 속으로 사라진 볼./ 뻔히 눈 뜨고도 모르는 사실들.”을 꿰뚫어 보는 자가 된다. 야구를 보며 “플라이 볼의 실재는/ 볼에 있는 걸까, 플라이에 있는 걸까./ 비어 있는 궁리(窮理)에 있는 걸까.” 고민하며 경기장 밖의 하늘을 인식하는 것이다.(「플라이아웃」)
시인 최승호의 말대로 여태천은 언제나 “여백”을 생각하며 “무기교의 기교”로 담담한 시상을 이어간다. “애통해하지도 않고 증오하지도 않는다.”(시인?문학평론가 서동욱) 하지만 삶을 놓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소금물을 아주 조금씩 마셔 가며/ 간절하게 그는 매 이닝을 던”진다.(「마이 볼」) 시인은 이 놀라운 시집을 통해 비밀을 공유한다. “역전 홈런”이 아니라 “파울플라이”라도 괜찮다고.(「암스테르담」) 무의미한 경기에 최대한 무의미해지는 것에서 비롯되는 우아한 멜랑콜리, 즐겁고 유머러스해질 수 있는 삶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로진백을 만지며 홀로 마운드를 고르고 있는 저 사람”은 슬프지 않다. 슬퍼지지 않고도 “조명 탑의 마지막 등이 꺼질 때까지/ 인조 잔디 위를” 전력 질주할 수 있다. 그러니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건조하게 손을 잡고/ 마지막 팬이 되어 응원을 하자.”(「꿈의 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