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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남자
어둠 속의 남자
저자 : 폴 오스터
출판사 : 열린책들
출판년 : 2008
정가 : 9800, ISBN : 9788932908465

책소개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세련되면서도 감성적인 문체로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아 온 폴 오스터의 최신 소설 『어둠 속의 남자』. 오스터 특유의 기법이 잘 살아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스터의 소설에서 자주 보기 힘든 주제 의식을 담아 낸 소설이다.

72세의 은퇴한 도서 비평가 브릴은, 얼마 전 아내를 잃은 데 이어 교통사고까지 당함으로써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한꺼번에 겪으면서 불면의 밤을 이겨내는 방편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은 '브릭'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브릴과 그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 속 주인공 브릭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되는 메타 소설의 형태를 띤다.

마술사로 생계를 이어 가며 평범하게 살던 브릭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전쟁의 복판에 떨어져 있다. 그는 갑작스레 처한 자신의 상황에 혼란스러워하지만, 곧 이 모든 것이 브릴이란 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이야기의 창조자인 브릴을 죽이는 것이며, 바로 자신이 그를 죽여야 한다는 지령을 받는다.

이야기 속 인물이 이야기의 창조자를 죽인다는 독특한 설정을 통해, 이야기 속 인물과 이야기 밖 인물이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또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브릭의 이야기와 브릴의 현실이 조응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들은 모두 자기 치유의 기능을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이야기하기〉에 관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목차


나는 지금 어둠 속에 혼자 있으면서 내 머릿속에서 세상을 굴리고 있다. 또다시 불면증이 엄습해 와 이 엄청난 미국의 황무지 속에서 또 다른 하얀 밤을 맞이한 것이다. 2층에서는 내 딸과 손녀가 각자의 방에서 잠들어 있다. 둘 다 독신인데 마흔일곱 살 먹은 무남독녀 미리엄은 독수공방한 것이 벌써 5년째이다. 스물세 살짜리 카티아는 미리엄의 무남독녀인데 과거에는 타이터스 스몰이라는 친구와 함께 잤으나 지금은 타이터스가 죽어 없기 때문에 상심한 가슴을 끌어안고 혼자 잠들어 있다. --- p.7

하사, 현실이라는 것은 단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야. 많은 현실이 있는 거야. 단 하나의 세상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세상이 있는데 그것들이 서로 평행하게 달리고 있어. 세상과 반(反)세상, 세상과 그림자 세상. 각 세상은 다른 나라에 가 있는 누군가가 꿈꾸고 상상하고 저술하는 바 그대로의 세상이라고. 각각의 세상은 마음의 창조물이라, 이 말씀이야. --- p.96

열세 살 아이일 때에 자기 자식을 집에서 내쫓은 그 여자는 은전 몇 푼이 아쉬워서 죽은 아들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파내는 데 동의했다. 누나는 내게 전화로 그 얘기를 하면서 흐느껴 울었다. 누나는 매부가 숨 끊어질 때까지 온갖 어려움을 근엄하고 완강한 견인주의적 태도로 참아 냈다. 하지만 그 사건은 누나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누나는 완전 결정타를 맞았고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고 말았다. 매부의 시신을 꺼내어 다시 매장한 후, 누나는 더 이상 예전의 누나가 아니었다. (……) 시카고에 사는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찾아오면 반가이 맞아 주었고, 집안의 대소사에 참석했으며, 아침부터 밤까지 텔레비전을 보았고, 정신이 좀 반짝할 때에는 그럴듯한 농담도 했다. 하지만 누나는 이미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 pp.118~119

딸애가 썼을 수많은 시간을 생각하자 나는 목이 메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나의 평소 반응대로라면 썰렁한 훈계나 시시한 재담으로 그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려 했겠지만, 그날 밤만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미리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니아는 물론 울음을 터트렸다. 아내는 행복할 때면 언제나 울었다. 그날 아내의 눈물은 특별하면서도 가슴 아픈 것이었다. 아내는 바로 사흘 전에 암 선고를 받았는데, 예후는 아주 나빴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무도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나, 우리 세 사람은 그녀가 다음번 내 생일 때에는 지상에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후 판명된 바에 의하면, 1년은 너무 큰 기대였다. --- pp.138~139

딸애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아니에요, 아빠, 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신 거예요. 전 아빠가 필요해요. 그 집에서 저 혼자는 너무 외로워서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워요. 누군가 말할 상대가 있어야 해요. 저녁 식사도 함께하면서 가끔 내 손을 잡고서 내가 그리 끔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어야 해요.
〈끔찍한 사람〉이라는 말은 리처드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것이다. 딸애의 결혼 생활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서로 추악한 언쟁을 벌이던 중에 그의 입에서 불쑥 나온 말이었으리라. 사람들은 격분하면 최악의 말을 내뱉는데, 미리엄이 그런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나를 가슴 아프게 했다. 딸애는 그 말을 자신의 성격에 대한 최종적 판단, 자신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저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 p.142

차로 돌아가는 동안, 브릭은 버지니아를 품에 안고서 키스를 하면서 입안 깊숙이 혀를 들이밀었다. 그것은 반평생의 꿈을 이루는 달콤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후회와 수치로 점철된 순간이기도 했다. 옛 사랑과의 쾌락을 위한 이 작은 서곡은 그가 플로라와 결혼한 이래 외간 여자를 만져 보는 첫 순간이었다. --- p.154

보이지 않는 별들, 보이지 않는 하늘. 내 숨소리. 카티아의 숨소리. 침대맡 기도, 유년의 의례, 유년의 엄숙함. 내가 잠 깨기 전에 죽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빠르게 사라져 버릴 텐데. 어제는 아이, 오늘은 노인, 유년으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심장 박동, 얼마나 많은 호흡, 얼마나 많은 말들이 있어 왔는가. 누군가 나를 만져 다오. 내 얼굴에 네 손을 내려놓고 말을 걸어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