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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여울
저자 : 이우환
출판사 : 디자인하우스
출판년 : 2002
정가 : 15000, ISBN : 8970413650
책소개
저자는 일반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지만 미술계에서는 꽤나 이름을 가진 사람이다. 유네스코와 호암 미술상, 세계문화상 수상작가라는 명칭외에도 일본 '모노파(物派)'를 창시한 이로도 알려져 있다. '모노'란 일본어로 사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물파' 정도 된다. 그의 작품은 단순하지만 그 사물 속에는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원성을 보이고 있다. 전작인 『여백의 예술』이 그의 미술세계를 설명하는 전문적인 에세이 집이었다면, 『시간의 여울』은 그러한 단순함에 대한 사랑과 사색을 담고 있는 매우 감성적인 에세이집이다.
이우환의 원래 꿈은 문학가였고 (지금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미술쪽에서 보자면 놀랄 일이지만) 그림쟁이는 경멸했다고 한다. 그가 서울대 미대를 중퇴하고 20세때 일본에 건너와 일본대학 철학과에 진학한 것도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이데거부터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책벌레로 살았던 그에게는 그러나 '언어'라는 장벽이 놓여 있었고 그는 그것을 끝내 넘지 못했다. 결과론적 이야기지만 어찌보면 그가 문학의 꿈을 접고 미술계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문학과 미술 양쪽에 승리를 안겨다 준 '윈윈 게임'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우환은 자신을 "국적은 한국이고, 40년간 일본에 적을 두고 살아왔지만 유럽에서 더 유명하다. 그래서 '5대 6대 1의 원칙'인 1년의 5개월은 일본에서 6개월은 유럽에서 1개월은 한국에서 지낸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그의 글은 지극히 한국적이지만("밭의 흙이 거뭇거뭇하게 냄새를 피운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아직 밭을 갈 시기는 아닌 것일까? 한국과 달리 일본의 진달래는 늦어, 어디에도 꽃의 낌새조차 없다. 차가운 바람결 사이로 그 말이 들려 온다. 봄이 되면 가랑비가 내린다. 그러면 백성들은 말이다, 들이나 산의 밭을 갈아 열심히 씨를 뿌리는 게야. 무슨 일이 있어도 씨를 뿌리는 게야"-「조부(祖父)」중에서) 군데군데 '떠돌이'의 냄새가 풍기기도 한다(「세월」「빨간 고추잠자리」).
이 책은 지난 1987년 일본에서 출판된 것으로, 몇 편의 글들이 고교 교과서에 실리거나 대입시험에 나오기도 하는 등 많은 화제를 뿌렸던 것으로, 지난 1994년 한국에서 출간되었던 것을 이번에 여섯 편의 단편을 첨가하여 새롭게 발간되었다. 전문적으로 문학을 공부한 이는 아니지만 한 부분에 '일가(一家)'를 이룬 이의 글인지라 사색과 여백의 미가 풍부한 감성적인 글이다. 책 말미에 실린 그의 대표 미술작품 6편도 좋은 감상거리다.
목차
여행지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깃발 없는 깃대 끝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먼 소년 시절의 일이 떠오른다.
전쟁이 끝날 무렵 시골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작은 개울가였다고 생각된다. 갓 묻은 듯한 생생한 무덤이 있었다. 미국 병사의 것인 듯한 높은 무덤 표지판 끝에 한 마리 빨간 고추잠자리가 앉아 있었다.
이윽고 잠자리는 하늘 멀리 날아가고, 그리고 표지판 끝은 텅 비어 버렸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인 일이 있은 후, 넓은 세계를 돌아다니고 오랜 시간이 흘러 지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덧없는 눈길로 허공을 쫓는 버릇은 멎지 않고 깊어만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