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검색
본문
Powered by NAVER OpenAPI
-
강빈
저자 : 박정애
출판사 : 예담
출판년 : 2006
정가 : 10000, ISBN : 8959131865
책소개
조선 왕실 최초로 조선 땅을 벗어나 광활한 중국 대륙에서 경영자로서의 능력을 한껏 펼쳤던 소현세자빈 강씨는 역사 속에서 잊혀진 여인이다. 어머니의 행장을 기록하는 딸 경녕군주의 이야기와 어머니 강빈의 일대기를 유려하고 묘한 문체로 풀어내고 있는 이 소설은 이중 구조로 정교하게 짜여진 구성이 돋보이는 새로운 여성주의 역사소설이다.
남성들의 역사(history)에 휘둘려 잘못 평가되고, 또한 남편 소현세자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강빈. 이러한 중세적이고 남성적 시각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시각으로 강빈을 다시 바라보면, 이재에 밝아 재물을 모으고 그것을 베풀어 사람을 끌어모으는 능력을 가진 그녀는 오늘날 젊은 여성들이 닮고 싶어하는 리더의 모습이며, 조선의 개화를 꿈꾼 남편 소현세자를 아낌없이 지원하고 내조한 모습은 오늘날 남성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파트너상에 가깝다.
여필종부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여인, 꿈과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열정을 아낌없이 불살랐던 여성, 강빈. 그녀의 짧고도 치열했던 삶은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고 싶어하는 이 시대 여성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동시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해줄 것이다.
목차
인조와 효종대의 실록이 전하는 민회빈 강씨의 캐릭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성품이 흉험하고, 행실이 좋지 않았다. 이재를 추구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고, 그 재물로 사람을 잘 유인하였다. 세자가 없을 때는 반드시 시강원의 장계를 가져다가 임의로 써 넣기도 하고 삭제하기도 하였으니 부인의 도리와 분수를 지키지 않았다. 세자가 강학을 폐하다시피 하고 무부와 노비들을 가까이 하며 화리만을 추구하고 서양 문물에 혹하는 등 많은 잘못을 범한 것은 대개 이 사람의 탓이다. 세자가 병이 있는데도 잠자리를 같이할 정도로 음란하였고, 임금의 처소 가까이에서 큰소리로 발악할 정도로 불순하고 거셌다.”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진실의 얼굴은 네모졌다가도 둥그레지는 법.
이재에 밝아 재물을 모으고 그것을 베풀어 사람을 끌어모음은 오늘날 여성 CEO의 자질이 아닌가? 중세적 부인의 도리를 과감히 벗어남은 일찌감치 현대적 여성 지도자의 면모를 발휘했다는 말이 아닌가? 소현세자의 많은 잘못이란 실로 조선의 국제화와 근대화를 이끌 지도자의 앞선 행보이니, 강빈은 그런 남편의 미더운 동반자였다는 말이 아닌가? 그녀의 음란함이란 지극한 사랑이며, 불순하고 거센 성격이란 정당한 분노의 솔직한 표출이 아닌가?
우리의 전통과 역사는 아들(그것도 잘난 아들)의 어머니만을 살리고 딸의 어머니를 죽인다. 모친살해의 현장에서 무력한 목격자가 되는 딸은 가부장제사회에서 아들의 어머니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한다. 자기를 죽여 버릇한 어머니들은 종종 딸들마저 습관적으로 죽이려든다. 이런 사회에서 어머니에게서 딸로, 그 딸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역사는 문자언어로 상징화되지도 상징화될 수도 없었다.
나는 문학 현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지금껏 어머니와 딸의 역사를 쓰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나의 작업은 늘 가부장제의 언어 안에서 헤매었고, 가부장제와 타협했고, 가부장제에 오염되었으며, 가부장제의 손을 빌렸다.
어찌하랴. 아지와 예옥의 어법을 빌리면, 나는 “살고 싶은 마음에 어찌할 줄 모르고” “천한 목숨이 아까워” 그리하였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머릿속에 등불처럼 켜져 있었던 이미지는 마돈나가 소장하고 있다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 「나의 탄생」이었다. 그림 속에서, 홑이불을 덮어쓴 여자는 액자 속의 성모가 눈물 흘리는 가운데 핏덩이 목숨과 사랑을 출산한다. 이 그림을 두고 여러 멋진 해석이 있지만, 나는 비린내 물씬 풍기는 이 그림에서 원초적인 허스토리herstory를 보았다. 우선적으로 목숨과 사랑의 역사인, 바로 그 지점에서 권력과 전쟁의 역사인 히스토리history와 구별되는 허스토리를.
나는 또한, 영화 「프리다」의 테마음악이었던 멕시코 노래 요로나La Llorona(울고 있는 여자)를 여러 가수들의 다른 목소리로 수백 번, 어쩌면 수천 번, 들었다.
내 사랑이 부족한가요? 내 삶을 통째로 바쳤건만 무엇을 더 원하나요? 내 사랑이 부족한 건가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더니, 지난 봄밤의 꿈속에, 360년 전 36세로 시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한 나의 주인공이 나타나 말했다.
“내 사랑이 부족한가요? 내 삶을 통째로 주었건만 무엇을 더 원하나요? 내 사랑이 부족한 건가요?”
꿈에 주인공이 보인 뒤라야 글이 풀리는 징크스가 있는 나로서는 꿈속에서도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그녀에게 말했다.
“내 심장에 달린 귀가 당신을 향해 열려 있어요. 어머니여. 어머니의 어머니여. 들려주세요. 당신의 삶을 통째로 내어주어야 했던, 그 사랑의 역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