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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파는 남자
이야기 파는 남자
저자 : 요슈타인 가아더
출판사 : 이레
출판년 : 2005
정가 : 10000, ISBN : 8957090592

책소개


철학 소설 『소피의 세계』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노르웨이 작가 요슈타인 가아더의 장편소설. 『소피의 세계』의 14살 소피나 『카드의 비밀』의 12살 토마스처럼 주로 십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교과서 같은 철학 소설들과 달리 『이야기 파는 남자』는 성인 ‘페테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요슈타인 가아더의 본격 성인 소설로 현재 세계 27개국어로 번역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기이한 운명을 짊어진 사내 페테르와 그가 제공한 이야기 소재들을 가지고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는 출판계의 어두운 뒷모습, 이 사건들 사이사이 등장하는 다양한 액자소설들, 그리고 결말을 장식하는 페테르의 운명을 둘러싼 충격적인 반전! 철학과 언어의 연금술사 요슈타인 가아더는 『이야기 파는 남자』를 통해 우리 자신의 존재 의미와 운명에 대한 아프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목차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래 :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

소설은 ‘어떤 이유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주인공 페테르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볼로냐 도서박람회장을 다급히 빠져나온 페테르는 가장 빨리 볼로냐를 떠날 수 있는 비행기를 집어타고 이탈리아 남부의 한적한 호텔에 짐을 푼다. 특별히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국을 등진 노르웨이인 헨리크 입센이 머물렀던 방을 택한 페테르는 “이제 모든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되도록 솔직하게 글을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기억의 끈이 닿는 곳까지 돌아가서 글을 쓸 것이다.”라는 설명과 함께, 지금 이 순간 ‘쫓기는 신세’가 되기까지 자신이 겪어온 숱한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페테르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는 공상하기를 즐겼다. 그래서 당연히 친구들이 많지 않았고, 심지어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얻어맞는 일도 잦았다. 그런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일은 공상과 생각을 통해 자기만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 그리고 시청 직원이었던 어머니가 가져다주는 공연 표를 가지고 어머니와 함께 영화, 연극, 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을 즐기고 난 뒤 어머니와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 두 가지였다. 그 결과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수백 가지 이야기를 담은 메모들이 생겨났고, 동화와 소설, 희곡, 시나리오의 초안들도 여러 편 갖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의 이야기의 유일한 청취자였던 어머니는 페테르의 친구이자 대화상대로, 심지어 유사 연인 관계로까지 비쳐진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간 이야기들이 수백 편을 넘었지만 페테르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손을 대서 작품으로 만들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그는 결코 소설을 ‘쓸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생각과 이야기들을 가지고 자기 작품을 쓰는 대신 페테르는 흥미로운 사업을 시작한다. 바로 이야기를 파는 것이다. 대상은 작가 지망생에서부터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에 이르기까지, ‘글쓰기’를 향한 욕망으로 들끓는 모든 인간들이다. ‘작가 구소호’라는 그럴 듯한 이름까지 붙였다. 시장은 얼마든지 넓어서 사업은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해외로까지 확장되었고, 처음에는 단발로 이야기 값을 받고 끝나던 거래도 점차 ‘인세’ 성격으로 바뀐다. 페테르에게서 구입해 간 이야기가 베스트셀러라도 되면 당연히 페테르에게 돌아갈 인세의 몫은 더 커진다. 이야기들 하나하나에 일련번호를 붙여, 팔린 것과 아직 팔리지 않은 것을 정확하게 파일로 정리해 보관한다든지, 작가들에게서 받은 수표는 꼭 복사를 해둔다든지, 거래 현장의 대화는 반드시 녹음을 해둔다든지, 페테르는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나름의 장치들을 마련한다. 혹시라도 페테르가 자신들의 모든 비밀을 폭로라도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작가들과 이야기를 파는 페테르 사이에는 점차 기묘한 권력 관계가 생겨나고, 바로 이 지점에서 출판계와 작가들의 위선 내지는 매너리즘에 대한 요슈타인 가아더의 냉철한 비판은 정점을 이룬다. 이야기를 파는 남자와 이야기를 사는 작가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들을 가지고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는 출판계, 과연 이들에게 ‘도덕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 것인지,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있을 것인지, 독자들은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게 된다.

오로지 고객 한 사람씩만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고객들끼리 서로 연결될 고리는 존재하지 않았던 페테르의 사업에 어느 날 갑자기 심각한 균열이 일어난다. 페테르가 이미 노르웨이에서 판매를 완료해 책으로까지 출간된 ‘체스의 비밀’과 내용이 똑같은 작품을 독일의 한 여류 소설가가 발표한 것이다. 우연의 일치로 묻어버리기에는 미심쩍은 점들이 너무 많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작가들에게 이야기를 파는 판타지 공장’과 그 공장의 실체인 ‘거미 인간’에 대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고, 페테르에게서 이야기를 사 간 작가들 사이에서는 페테르만 모르는 그들만의 모종의 공모가 시작되는 듯하다. 급기야 소문은 기사화되어 신문에까지 실리고, 볼로냐 도서박람회 현장에서 출판계 동료로부터 심각한 경고를 받은 페테르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다급히 도주 길에 오른다.


페테르-마리아-베아테-파니나 마니나 : 우연과 운명을 둘러싼 아프고 슬픈 이야기

아까 당신은 내게 담뱃불을 빌리러 왔던 것이 우연이라고 했어.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내가 불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들리는걸. 그녀가 나의 자그마한 항변에 웃음을 지었다. 이 항변은 내가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꼼꼼하게 챙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말했다. 적어도 내 라이터에 가스가 다된 것은 우연이었어요. 그러나 당신은 결코 우연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_본문 중에서


볼로냐를 떠나는 가장 빠른 비행기를 집어타고 페테르가 도착한 곳은 이탈리아 남부의 한적한 마을. 헨리크 입센이 묵었던 호텔 방에 머물면서 페테르는 자신의 지난날들을 하나씩 반추하며 일종의 회고록을 써 내려간다. 전 세계 작가들을 상대로 하는 판타지 공장이었던 ‘작가 구호소’에 관한 내용이 회고록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면, 또 다른 축은 페테르의 인생에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는,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그 존재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크고 작은 비밀들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내 가슴을 건드리는 사람, 내가 소통할 수 있고 소통하고 싶은 내 인생의 첫 사람’이었던, 그래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허둥지둥 사랑에’ 빠졌던 여인 마리아, 그녀가 제안했던 ‘계약 임신’과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 이어지는 마리아와의 결별, 그리고 이십여 년 뒤 다급히 떠나온 이탈리아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을 느낀 여인 베아테….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이야기들의 주관자로서 항상 자신이 모든 것을 조정하고 스스로 자기 삶조차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페테르였지만, 그의 이런 믿음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페테르는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거미줄처럼 자아낸 수많은 이야기들에서와 달리 진짜 삶 속에서는 페테르 역시 한 층위 높은 삶의 영향력 아래 있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우연과 운명을 둘러싼 이토록 아프고 슬픈 ‘반전’은 소설의 도입부부터 등장해 다양하게 변주되는 액자소설인 ‘파니나 마니나’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극적 효과가 정점에 이른다. 아울러 페테르의 기억은 서너 살 무렵까지 빠르게 달려가, 부모의 이혼으로 이어진 어느 가을 아침의 사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 없도록 만든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일화로 인한 상처 등, 페테르 자신이 애써 외면해왔던 인생의 비밀들을 하나씩 까발린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수백 가지 이야기의 주관자로서 전 세계 작가들을 주물렀던 ‘이야기 파는 남자’ 페테르의 초상은 한없이 초라해지고 그가 짊어진 고독하고 슬픈 운명의 그림자만이 소설의 전면에 버티고 서 있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 속 이야기들, 다채로운 서사의 향연

《이야기 파는 남자》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는 요슈타인 가아더가 페테르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다양한 액자 이야기들이다. 작품 전체에 세 번 등장하며 매번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는 서커스 단장과 그의 잃어버린 딸 파니나 마니나 이야기, 스코틀랜드 지방 영주의 ‘인간 체스’ 파티와 이후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 이야기, 태어나자마자 떨어져 자란 쌍둥이 형제가 베트남전에서 적으로 만나 서로를 죽이게 되는 쌍둥이 이야기, 영혼의 수가 120억 개로 정해져 있어서 세계 인구가 그 수를 초과하는 순간 영혼이 없는 인간들이 태어나게 된다는 ‘영혼 결핍증’에 얽힌 이야기, 바이러스로 대부분의 인구가 죽고 전 세계에 339명만이 살아남는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 ‘아마조나스의 복수’, 다이아몬드 보석상이었던 막내가 억울한 죽음 뒤에 형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사후의 삼중 살인’….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액자 이야기들은, 작품 속에서 페테르에게 이야기를 사 간 작가들이 그러했듯, 또 하나의 소설을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페테르의 현재와 과거에 대한 기억은 이처럼 다양한 액자 이야기들과 몸을 섞으면서 소설 《이야기 파는 남자》를 다채로운 서사의 향연으로 만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