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검색
본문
Powered by NAVER OpenAPI
-
캐비닛
저자 : 김언수
출판사 : 문학동네
출판년 : 2006
정가 : 9800, ISBN : 8954602592
책소개
2006년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 출간됐다. 2002년 가을문예공모, 2003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가 김언수의 장편소설 <캐비닛>. 이 세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담는 '13호 캐비닛'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스무 편이 넘는 에피소드가 옴니버스로 구성되어 완성도 높은 형식미를 보여준다.
작품의 화자는 178일 동안 캔맥주를 마셔대고 하릴없이 캐비닛 속 파일들을 정리하는 삼십대 직장인. 평범하기 그지 없는 그의 낡은 캐비닛은 온갖 기이한 존재들로 가득하다. 172일 동안 자고 일어난 토포러들, 잃어버린 손가락 대신 만들어넣은 나무손가락에 살이 붙고 피가 돌아 육질화되어가는 피노키오 아저씨,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지고 태어나 스스로 임신까지 하는 네오헤르마프로... 작가는 이들을 '심토머'라 부른다.
소설 <캐비닛>은 심토머들의 기록과 이를 정리하는 화자의 이야기이다. 심사 당시 '새롭지 않은 새로움(김윤식)', '돌연변이들의 박물지(류보선)', '정밀하고 세련된 작품(은희경)', '유창한 서술, 익살맞은 재담, 날카로운 아포리즘(황종연)', '불량한 서술자(전경린)'이라는 평을 받으며, 일곱 명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를 이끌어냈다.
목차
파일 No. 1
“이번 달에는 꽤 많이 자랐어요. 보이시죠? 뿌리가 살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잖아요. (……) 정말 굉장해요. 이번 달에도 엄청나게 자랐어요. 똥을 썩힌 거름을 바른 게 효과가 있나봐요.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요, 하하. (……)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요. 햇빛은 어느 정도 받아야 하는 건지, 은행나무는 암수딴그루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교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팔을 벌리고 있으면 알아서 교배를 해주는 건지, 아니라면 벌이나 나비가 해주는 건지. 저는 벌을 싫어하는데 어떻게 하죠? 하지만 괜찮아요. 나비는 좋아하니까요.”--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파일 No. 2
문득 내가 곧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라고 설명은 못 하겠지만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학교 운동장에서 빠져나왔어요. 학교 운동장에 시체를 두면 안 되니까요. (……) 분리된 몸이 죽는 주말에는 항상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남해로 갔어요. 처음엔 무섭고 떨려서 그냥 산에 묻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아는 스님이 있어서 암자에서 몰래 화장을 합니다. (……) 저에게는 일곱 번의 죽음이 있었어요. 그때마다 죽은 제 몸을 처리해야 했어요. (……) 재에서 나온 제 뼈들은 무척 뜨거워요. 뜨거운 뼈를 만지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죠. 아름답고 행복한 나는 모두 죽어버리고 이 밀리미터 나사를 돌리는 나만 지겹고도 지겹게 오래 사는구나.
파일 No. 3
시간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을 타고 있다가, 무심하게 책장을 넘기다가,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혹은 멍하니 시계를 보고 있다가 그들은 짧게는 십 분에서 두세 시간을, 길게는 며칠에서 몇 년에 이르는 시간을 한꺼번에 잃어버린다. 자신은 불과 몇 초가 지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터무니없이 많은 시간이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다.
“저의 사라진 시간들은 지금 어디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는 걸까요. 그걸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파요.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누군가를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할 수도 있는 시간이잖아요. 사라진 시간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낭비도, 폐허도, 후회도, 상처도,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았다는 느낌도 없죠.”
파일 No. 4
고개를 돌리는 남자의 얼굴이 바로 나였어요.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죠. 분명히 나 자신이었어요. 진짜 나 말이에요. (……) 다가가서 나도 모르게 그를 안았어요. 마치 자기 신체의 일부를 만지는 것같이 자연스러운 느낌이었어요. (……) 우리는 모텔로 갔어요. 섹스를 했죠. 즐겁고 기묘한 섹스였어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내가 이 사람과 왜 섹스를 하고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런 섹스 말이에요. (……) 우리는 한 침대에서 같이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제가 먼저 일어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잠든 제 모습을, 아니 잠든 그의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봤죠. 잠들어 있는 제 모습은 뭐랄까, 아주 사랑스러웠어요.
파일 No.5
_그녀는 일기를 읽는다.
_그녀는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과거를 고친다.
_시간이 지나 그녀는 자신이 일기를 고쳤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_그녀는 다시 일기를 읽는다.
_이제 수정된 과거가 그녀의 기억을 지배하기 시작한다.